쇼펜하우어 고통 총량의 법칙
쇼펜하우어 고통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죽음
자살이란 비참한이 세상에서 실제적인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엉터리 구원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최고의 도덕적 목표에 달하는 것에 배치된다. 현실에 살만한 가치가 없다면 죽음을 통해서 구원이나 해방을 꿈꿀 수도 있겠지만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실패라고 말한다. 죽음을 통해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나기 때문. 특히 자살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삶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증가한다. 죽음을 통해 삶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짓이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두뇌와 육신이 노화로 쇠퇴하는 것을 피할 수 없고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죽음이다. 그러하기에 죽음의 유혹은 늘 존재한다.
나와 상관없이 세상은 잘 돌아간다
마치 무지개를 구성한 하나의 물방울이 아무리 교체되더라도 무지개 자체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한결같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비유한 무지개와 물방울은 자연 전체가 한 개체의 죽음에 상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우주를 가득 채운 삶의 의지는 개인의 죽음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다. 자연은 개인이 아니라 종족적을 보존하기 위해서 모수한 꽃씨를 뿌리고 수천 개의 알을 뿌리면서 애쓴다. 물방울이 사라져도 무지개가 변하지 않듯 나의 죽음으로 세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이 세상은 인간 개개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정하다.
우주 전체와 종족은 영원하지만 개인은 무상하다. 자연에서 그런 존재인 인간에게 죽음이란 개체성을 잊어버리는 잠일뿐이다. 그러니 자살은 어리석은 짓이다. 죽음은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다.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고통의 해결 수단이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그 당시 유럽에서 유입된 인도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애견을 아트만이라고 불렀다. 아트만은 숨 쉰다는 뜻이다. 숨 쉬는 생명인 아트만은 나를 말하는데 개인의 내재하는 원리를 뜻한다. 반면 브라만은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를 지칭한다. 따라서 아트만과 브라만은 각각 소우주와 대우주를 의미한다. 인간은 이우주를 구성하는 개체에 불과하며 그런 소우주를 포괄하는 브라만 즉 대우주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실레노스의 이야기와 지혜가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잘 나타나 있다. 숲 속의 신 실레노스는' 가장 좋은 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최선의 것은 네가 얻을 수 없다. 태어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無가 가장 좋은 것, 하지만 차선의 것은 네가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당장 죽는 것이므로"라고 답한다.
인간은 죽음보다는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더 고통을 느낀다.
현재를 긍정하는 사람은 삶의 끝이 없기를 기대하지만 몸의 공포가 현재를 몰아내 마치 현재가 없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삶에 대한 사랑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살아간다. 에피크로스의 유명한 말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과 함께 모든 감각과 의식이 끝나기 때문에 죽음에는 쾌락도 고통도 없다.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것을 잘 견뎌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고통에 대한 해법은 해탈이 아니라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지니면서 견디는 것이다.
고통 총량의 법칙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언제 어디에서 얼마나 겪을지 예측할 수 없을 뿐 있는 그대로를 직시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