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고독 공감
쇼펜하우어의 고독과 공감에 대하여
쇼펜하우어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가? 중 고독. 홀로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가치 있게 살 수 있다. 온전히 혼자 있어보라. 공감. 인간의 양가감정. 사랑하지 않아도 미워하지 말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은 이야기들을 들여다보자.
고독
혼자 있는 법을 익혀라. 인간이 사교적으로 되는 것은 고독한 상태의 자기 자신을 견딜 능력이 없어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행복의 조건을 자족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쇼펜하우어는 고독과 사교성을 대립하는 것으로 본다. 지적 능력이 클수록 혼자 지내려는 경향이 강하고 지적능력이 떨어질수록 어울리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독은 위대한 사람의 특성이다. 오직 자기 자신과는 유일하게 완전한 융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마음의 평화와 행복은 오직 자신의 고독 안에서 생겨난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그 원천인 고독을 피하지 말고 그것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고독한 모습일 때 본래 지닌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홀로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가치 있게 살 수 있다.
스스로 정신적 온기를 충분히 지닌 사람은 굳이 무리를 지어 모일 필요가 없다. 사교성이 정신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체온으로 충분히 지낼 수 있는 사람의 덕목은 고독이다. 아무리 친한 사람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다. 그것은 나중에 그 솔직함이 뒷담화와 비방의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정과 사랑, 결혼으로 이루어진 밀접한 관계도 비밀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런 면을 보면 다른 사람과의 교제가 적을수록 좋다. 잡담, 유흥, 즐거움 뒤에는 가식적인 모습이 있다. 언제 어디에서나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해야 된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정확하게 말하면 고독한 시간을 생산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무능력 내면의 공허 권태감 때문이다. 이럴 때 남과 어울리는 것은 자신의 고독을 혼자 대면하기 두려워 피하는 것이다. 가장 가치 있는 삶은 홀로 지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쳐 결국 되돌아와 만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본래 모습이다. 다른 사람과 어쩔 수 없는 관계를 줄이면 자신만의 자유와 욕구가 회복된다.
온전히 혼자 있어보라.
고독은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인간은 홀로 설 수 있을 때 어른으로 더욱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고독은 인간의 본성에 맞는 본래 행복한 상태로 되돌아가게 해준다. 자신의 고독에서 느끼는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인간의 군집 본능이다. 단지 심심하기 때문에 함께 어울려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예시처럼 금관악기로 협연을 못하는 연주가와 비슷하다. 훌륭한 거장은 충분히 독주를 할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도 혼자 힘으로 잘 살 줄 알아야 한다.
참된 행복은 자신 안에서 혼자의 힘으로 찾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위해 생각과 지혜 등을 풍부하게 할 필요가 있다. 행복을 밖에서 찾지 않고 자신 안에서 얻기 위해 중요한 덕목이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만 온전히 그 자신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독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유도 사랑하지 않는 자라 할 수 있다.
공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느껴라. 고통은 다른 사람과 나누면 그만큼 줄어든다. 연민, 공감, 동정은 쇼펜하우어가 다른사람과 교제하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뽑았다. 쇼펜하우어는 진정으로 같이 있는 일이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며 그런 동점심만이 비이기적 행위의 유일한 온천이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에게 동정심은 세상 모든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낌으로서 이기심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을 뜻한다. 조심해서 행동하고 아량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조심함으로써 손해와 손실을 막을 수 있고 아량을 베풀어 다툼과 싸움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양가 감정
쇼펜하우어는 도덕적 관점으로 인간의 행위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인간의 행동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목표로 할 수 있다고 보고 기본 동기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첫 번째 동기. 이기주의다. 자신의 평안만을 간절히 추구하는 것이며 그 한계가 없다. 두 번째 동기 악의다.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으로 작용한다. 세 번째 동기 동정심이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인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다. 네 번째 동기. 이름 붙여지지 않은 동기. 금욕주의다. 행위자 자신의 불행을 요구한다.
이런 동기 가운데 동정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더 큰 관심을 두는 점에서 다른 동기들과 대비된다. 타인의 불행에 대한 동정심은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를 없애버린다. 연민은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즉 타인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똑같이 여기는 순수하고 비이기적인 본래의 착한 마음이다. 반면 이기주의나 악의적 행동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요구한다. 동정심과 반대의 감정은 '남이 안 돼야 행복'이라는 표현이 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감정은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감정은 아니다. 남을 짓밟고 올라가야만 자신이 살아남는 살벌한 경쟁을 경험한다.
40대라면 얼마나 이기적인 동물인지 경험하고 알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생명 가족의 행복 자신의 성취를 위해 남과 경쟁하면서 살아간다. 다른 한편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인해 생명을 잃는 현장을 보면 그 비극의 가슴 아파하고 함께 울기도 한다. 그때 자신을 가두고 있는 이기심의 벽이 한 번에 무너진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야 하는 존재다. 다른 사람을 이겨야만 하지만 불의의 사고에 희생당한 사람에 대해 가슴이 먹먹해지는 모순적인 존재다.
사랑하지 않아도 미워하지 말 것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경제적인 약자에 대한 사회적인 배려를 강조한다. 자유주의 경제학을 주장하면서 시장경제의 경쟁 원칙을 옹호한 사람인데 나중에 생각이 바뀐 것은 약자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실험이 있었다. 신생아실에서 갓 태어난 아이에게 다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려줬더니 그 아이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가 함께 울기 시작했다. 정작 자신의 울음소리를 녹음해서 들려주면 반응이 없었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동점심은 타고나며 다른 사람에게 쉽게 전이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측은지심은 살아가는데 늘 강조됐다. 독일 철학자 칸트는 팔이 안으로 굽듯이 동정심과 연민이 너무 자의적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니체는 동정심도 이타심이 아니라 이기심의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것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약자들의 이기심이라는 것이다. 그는 同苦는 낮은 동물들도 느끼는 감정이입으로 오히려 인권은 同樂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약자에 대한 지나친 배려나 호언은 그 사람이 스스로 인생을 완성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는 주장으로 스토아학파의 주장이다. 우리는 함께 살기 위해 고통을 함께 나눌 필요가 있다. 동시에 역차별과 자립심을 고려해야 한다.
40대는 무한경쟁, 적자생존, 승자 독식의 논리에 따라 살던 시대를 경험했다, 남보다 더 잘해야 안정받는 세상에는 이기심이 가득하다. 이웃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감수성을 키울 필요가 있다. 자신에게, 상대에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느껴보자.